고위 귀족과 왕족을 재판할 권리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만이 가지고 있었다. 결혼을 무효로 돌리겠다고 떼를 쓰는 왕을 황제는 어르고 달래어 보았다. 기독교는 이혼을 불가능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고, 가능한 것은 오직 결혼을 무효로 돌리는 것이었다. 일단 두 집안은 ‘격이 맞아’ 적당했고, 파혼을 승인했을 때 왕비의 출신 가문인 공작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뻔했다.
말은 번지르르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는 명예직에 가까운 것이지만, 대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의 주인이라는 상징성이 있기는 했다. 투표는 옛 전통에 따라 선제후들이 모여서 하는데, 당연히 필요한 것은 이들의 표를 매수할 돈이었다.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면 공작의 지지와 지원이 필요한 황제는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황제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신부를 면담했다. 그녀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제 지참금만 돌려받을 수 있다면 파혼하겠습니다.”
파혼한 여자에 대한 시선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성관계를 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으나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평생 독신으로 살거나 재산을 정리하고 수녀원에나 들어가게 되겠지. 나름 먼 친척인 황제는 끈질기게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지참금과 기름진 땅, 가문의 힘과 젊음. 최고의 신붓감으로서 수많은 구혼을 받았던 시절은 잊어야 할 것이라는 냉정한 조언이 끝없이 이어졌다.
전영중은 황제의 조언에도 혼인 무효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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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선을 따라 차갑게 식은 공기가 내려왔다. 영중은 여전히 혼자였고, 그녀의 아버지는 초조하게 이곳저곳 초상화를 보내며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지난 ‘결혼생활’ 동안 아이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폐결핵 환자 같이 빼빼 마른 아가씨들도 아이를 낳는데 어째서 사지 멀쩡한 네가 아이를 가지지 못한단 말이냐!’ 그러면 영중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자식이 불능인걸요!’ 라고 외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 새끼’의 성 기능은 멀쩡했다. 영중은 월경이 늦어질 때 일말의 기대를 품고는 했다. 뭐가 문제지? 그녀는 바그다드에서 제일가는 의사, 유대인 신비학자, 이탈리아의 해부학자가 쓴 책을 읽으며 원인을 찾으려 노력했다. 당시 이슬람권에서는 멘델과 다윈 이전에도 부모의 형질이 자식에게 넘겨진다는 초기 유전학의 개념이 존재했다. 그녀는 외할아버지의 서고를 뒤지며, 아랍인들이 세운 알 아즈하르 대학에서 공부한 그리스인 의사들이 남긴 혈통에 대한 수리적인 분석을 자신의 가계에 대입하려 했다.
여전히 피타고라스를 신봉하는 그 이단 기독교인들의 문헌들은 영중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녀는 근본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하지만 무엇이? 왜?
얼마나 많은 기사들이, 귀족들이 나의 벨벳 장갑 위로 입을 맞추며 승리의 맹세를 했지? 나에게 얼마나 많은 보석과 예술작품들이 바쳐졌지? 나는 나를 사랑한다고 목 놓아 우는 이들을 가지고 놀며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 왕과 결혼했어. 내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지위를 가지고 싶었지. 왕이 사랑한 여자 한명은 하수도에 버렸고, 한명은 변태와 원하지 않는 결혼을 시켰지. 모든 것이 완벽했는데.
모든 것이 완벽했는데.
멀리서 푸른 점이 팔락거리며 내려왔다. 선명한 파란 염료는 오직 고위 성직자와 왕족에게만 허용된 것이었다. 전영중은 그제야 왕이 한 협박이 생각났다. 너는 화형대에서 불타게 될 거야. 발바닥 가죽은 전부 벗겨지고 물고문을 당한 다음 숯검댕이 되어 죽겠지! 그녀는 서둘러 창가에서 몸을 돌려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비상 대피로의 위치를 되새기고, 평범한 옷차림을 했다. 두건을 뒤집어쓰고 숨을 죽이며 조용히 응접실 구석 그림자에 바싹 붙었다.
“자네는 수도사 신분이었지 않나.”
“귀족 자제가 수도원에서 공부하다 환속하는 것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제가 상속받을 작위와 영지가 있지 않습니까.”
“격이 맞지 않네!”
“앞으로 들어올 혼담은 더욱 격이 맞지 않을 것입니다.”
“딸이 원하지 않을 거야. 그 애는 요즘 방구석에 처박혀서 수녀처럼 산다네.”
“저를 거절할 순 없을 겁니다.”
“…딸아이를 불러오지."
누구지? 영중은 흘긋 구혼자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북해의 바다처럼 검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한쪽 눈만. 그의 오른 눈은 불행히도 안대로 가려져 있었다. 피부는 기사답지 않게 곱고 창백했고, 검은 더벅머리가 이마 위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다. 영중이 아는 사람 중에 이런 남자는 한명 뿐이었다.
성준수.
“저기 계시는군요.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공작은 성준수의 말에 쥐새끼처럼 숨어있던 영중을 발견하고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호통을 치러 입을 열었다가 손님의 존재를 의식하고 혀를 차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성준수는 공작이 자리를 비켜주자마자 거만하게 자세를 고쳐 앉으며 시건방을 떨었다. 적어도 영중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내가 하다못해 애꾸눈 사생아 새끼의 구혼을 받는 처지가 되었구나."
영중이 비꼬며 쏘아붙였지만 성준수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그에게는 '사생아'와 '애꾸눈' 둘 다 흠이 되지 못하는 듯했다. 성준수는 무릎 위에 올려둔 한쪽 다리를 까딱거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랑 결혼해."
싫어. 너만은 싫어. 영중은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늑대 가죽으로 덮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손에는 하인들이 마시는 싸구려 맥주가 들려있었다.
"처녀라는 증언은 거짓말이야."
"그렇겠지."
"반면 너는 새파란 아다새끼야. 그렇지? 너는 수도사 신분이었고, 기사수도회에서 오랜 기간 복무했어. 결혼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딸만 쳐도 벌을 받는 삶을 살았잖아. 슬라브인들과 타타르인들을 막기 위해 참전했고, 내가 알기로 번 돈은 마뜩잖아. 왜냐하면 슬라브인들과 타타르족은 말박이 거지새끼들이기 때문이지! 기사단이 황금을 쌓아놓고 있는 것도 십자군 시절의 이야기야. 네 근무지는 동유럽의 썩어가는 늪지대였고, 네가 여자랑 씹질을 해봤어도 말도 안 통하는 데다 똥통 냄새가 나는 불쌍한 헝가리 농노 아줌마였을걸!"
"결혼이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
"너랑 나랑은 너무 다른 인간이라는 뜻이야." 영중은 손에 들린 거대한 나무 잔을 들어 맥주를 들이켰다. "준수야. 성준수."
"듣고 있어."
"...애가 안 생겼다고."
"애?"
"나는 씨발 임신을 못했단 말이야! 빌어먹을 애새끼가 이 배에 자리 잡지 못했다고!" 영중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게 마지막 조각이었어! 멍청한 딸이라도 낳아줬어야 했는데! 우리 둘의 지배권을 합치면 황제의 자리도 노릴 수 있었어! 그런데... 그런데..."
"진정해. 생기겠지! 애는 만들어지는 거야." 그는 속이 답답해져 '멍청한 고자 새끼'라고 중얼거렸고 영중은 성준수의 입술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새끼는 멀쩡했어. 내가 문제였다고... "네게서 아이를 얻지 못하면 사생아라도 낳아서 올게. 그게 뭐가 대수라고. 나는 너에게 충실할 거야. 네가 아이가 없어서 불만이라면 그렇게라도 하지 뭐."
그건 정말로 성준수다운 발상이었다. 아이는 단순히 둘의 결합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안정적인 후계, 정통성, 권위, 완성된 가족. 그 모든 것을 의미했다. 단순히 아무 애새끼나 데려온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영중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뭘 가지고 싶은 건데? 황후가 되고 싶었던 건가?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알다시피 황제의 자리는 그냥 명예직이야! 왜 탐을 내는지 전혀 모르겠어."
"황후가 대수니? 나는 내 머리 위에 앉은 남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게 전부였지... 그건, 그건..."
영중은 소파에 늘어져 자신이 거의 발가벗겨지듯 자신의 실패와 분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성준수이기 때문이야. 성준수가 눈앞에 있어서...
"그만하자. 난 이 성에 틀어박혀 살거나, 수녀가 되어버리거나 하겠어... 너랑 내가 결혼하는 일은 없어.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나는 존나 한심한 년이라 너랑 결혼하기 싫은 거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준수 넌 괜찮은 영지와 작위를 손에 넣었나 봐? 환속(성직자가 평신도의 신분으로 돌아가는 것)한다고 하게! 그래, 넌 나 같은 마녀, 미친년, 창녀하고는 다른 사람이 되었잖아! 그런데 왜 나를 골라? 씨발... 넌 진짜 존나 한심한 새끼야..."
토할 것 같아. 토할것같아... 눈앞이 빙빙 돌았다. 몇모금 마시지도 않았는데, 너무 오랫동안 기운이 없다고 먹을 것과 술을 멀리한 결과 같았다. 치맛자락을 세게 말아쥐어 손끝이 하얗게 질려갔다.
"황태후."
황태후가 뭐.
"황태후가 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셈이지?"
"황.... 황... 뭐?"
"네 아들, 주어온 애새끼, 창녀의 자식. 그게 누구든지 말이야. 네 법적인 자식이 황제가 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성준수는 느릿느릿 또박또박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황제 선출권이 있는 변경백의 지위를 물려받게 되었어."
"...거짓말이야."
"나도 몰랐는데. 딸에게는 작위와 땅을 물려줄 수 없지만, 외손자에게는 물려줄 수 있거든."
"거짓말!"
"그렇게 되었어. 내가 애비없는 자식이지만, 외삼촌들이 다 자식 없이 죽어버렸거든. 네가 말한 동유럽의 똥통에서 다 뒤졌지... 어쨌든 이게 중요한 게 아니야. 늙은 변경백이 나를 선택한 게 전부거든... 안 그래?"
전영중은 얼굴이 새파래져 성준수를 노려보았다. 이건 악몽이다. 하느님이 나에게 벌을 주신 거야... 새끼를 낳는 의무와 달에 한번 피를 흘리는 저주를 준 하늘에 계신 씨발놈의 아버지가... 어떻게 성준수에게 작위가 굴러떨어진다는 운명이 탄생했지? 어째서 성준수에게 황제 선출권이 생겼지? 왜... 어떻게 더....
어떻게 더 대단해질 수 있는데?
"울지마."
너는 몰라.
"나랑 결혼하면, '우리'의 것이 되는 거야."
비참해할 이유가 없어. 너랑 나는 하나가 될 거니까... 너의 것은 나의 것이 될 것이고, 우리가 만든 애새끼는 한 표를 쥐고 태어나는 셈이지....
악마가 영중의 귀에 속삭이는 듯했다.
걍 떡이나 쓰고 싶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이상한걸 쓸 시간이 없어서 슬퍼요
체력이 저질이라 여섯시 퇴근을 하면 저녁먹고 드러눕습니다
저는 준빵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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